고대 경제와 사회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를 중점적으로 기억하면 돼.
우선 삼국과 남북국시대를 비교하면서 진행을 하자.

I. 수취제도

1.조세

수취제도는 조세·공납·역이 있다고 했지?
조세는 호(집)재산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서 곡물과 포로 차등 징수 했어.
호는 토지면적(고구려-경무법-면적 기준, 백제-두락제-파종량 기준, 신라-결부법-수확량 기준), 가축의 소유 등 재산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눴단다.

통일신라는 더 세밀하게 '상상 상중 상하....하중 하하'로 9등급(가족 구성원 수 기준)으로, 또한 사람까지 나이와 성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어.
호는 9등급 사람은 6등급!

근데 삼국시대에는 토지생산량이 매우 낮았고, 전쟁도 많이 일어나던 시기라 토지세만으로는 국가 재정을 해결할 수가 없었어.
또한 삼국시대까지는 토지 관리도 엉망이었고...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 개인당 일정량의 인두세(포)를 걷었단다.
인정(人丁) 역시 조세 수취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야.
이렇게 토지 뿐만 아니라 사람한테도 세금을 매긴 것이지.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살아서 숨 쉬고 있다면 세금을 내야 돼ㅋ
하지만 남북국시대로 가면서 토지에 대한 관리도 좋아졌고, 또한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토지생산량 역시 증가했어.
게다가 삼국시대에 비해 전쟁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굳이 인두세를 걷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세금이 걷히는 거야!
이로 인해 인두세는 폐지되고 백성들은 토지에 대한 세금 만을 내게 되지.
참고로 통일이후에는 조세를 보통 생산량의 1/10을 걷었단다.

2. 공납

공납은 촌락단위로 특산품을 내는 거야.
예를 들어 제주도면 귤이나 흑돼지를 내는 거지ㅋ​(정확한 사료 바탕은 아님. 그냥 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든 것)
집집마다 걷는다고 해서 호세라고도 했어.
조세는 땅주인인 지주가! 공납은 집주인인 호주가!
이건 조선까지 쭉~ 나올 개념이니 잘 기억해둬.

3. 역

역은 요역군역으로 나뉘어.
요역은 나라가 부르면 걍 나가서 노가다 뛰는 거야.
예를 들어 주말에 거실에서 편하게 드러누워 티비 보다가 갑자기 국가에서 주민센터 새로 짓는다며 나오라고 하면 나가서 임금도 받지 않고 노가다를 해줘야 돼 ㅡ.ㅡ
삶 자체가 헬이지;
옛날에 비하면 지금 세상 참 좋아졌지?ㅋ

그리고 군역은 군복무를 하는 거야.
그 시대에도 건강한 남자라면 군대를 갔어ㅋ
역은 삼국시대 때는 15세 이상, 통일신라 때는 16~60세라는 것을 알아둬.

4. 민정문서

위의 수취제도를 알 수 있는 것은 민정문서 덕택이야.
이게 일본 도다이사 창고에서 발견된 건데...
신라 서원경 부근의 4개 촌락의 조세 징수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단다.
촌의 행정을 담당하는 촌주들이 매년 토지, 인구, 가호, 노비, 나무 및 소와 말의 증감 등의 변동사항을 조사해서 3년마다 작성한 촌락문서인데, 조세와 부역을 확보할 목적
으로 촌락 단위로 세금을 부과했다는 점 등 많은 정보가 담겨있어.
문서를 3년마다 작성한 것이지, 세금을 3년마다 걷은 게 아니다! 착각하면 안 돼. 세금은 매년 거두었어!
이처럼 국가가 직접적으로 촌주에게까지 문서작성을 요구한 것을 보니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을 알 수 있지?

● 조세를 거두는 기준은 호마다 재산의 정도에 따라 나눔. 삼국시대는 3등급. 통일신라는 재산 9등급. 사람 6등급. 삼국시대에 인두세 존재.
● 경무법(고), 두락법(백), 결부법(신)
● 민정문서. 일본 도다이사에서 발견. 신라 서원경 부근의 4개 촌락 조세 징수 내용. 토지·인구·가호·노비·나무 및 소와 말 등의 변동사항 조사하여 3년마다 작성. 조세를 매년 거둠. 주생산층은 평민. 9등급 중에 '하하'호가 가장 많음.

II. 백성들을 위한 정책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진대법!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의 정전!
이 두 가지만 기억해둬.
이들은 절대 귀족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야! 기억해둬.
다 얘기한 거니 자세한 설명은 패스할게~

● 삼국시대 고구려 - 진대법
남북국시대 - 정전

III. 경제

1. 농업 기술의 발달

철제농기구가 철기시대에 발명되긴 했지만, 그때는 겁나 비싸서 웬만한 경제력이 없으면 소유할 수가 없었고, 드디어 삼국시대인 4,5세기를 지나면서 대중화가 돼.
그러므로 농산물의 생산량이 급상승했지.
또한 국가에서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는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개간을 장려하여 점점 농업기술이 발전해.
그리고 지증왕 때 와서는 우경을 장려하여 더더욱 급상승!
(이때 우경이 시작됐다는 말이지, 아직 일반화가 된 것은 아니야. 꼭 기억해둬!)

이때 당시에는 시비법(비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휴경농업을 해야 했어.
휴경농업이 뭐냐면... 한번 농사를 지으면 땅이 지쳐서 생산이 잘 안 돼.
따라서 1,2년 묵혀두고 기름질 때를 기다려서 경작을 하는 방법이야.
비료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가? 그 묵혀두는 동안에는 식량이 생산이 안 되는 거야;
남북국 시대도 마찬가지였어.

2. 상업의 발달

상업 역시 삼국시대 오면서 발전해.
생산량이 증가하여 재화가 많아지니까 거래가 빈번해져서 소지왕 때인 5세기 후반에는 경주 등 대도시에 시장이 생겨.
시장이 점점 더 커져서 지증왕 때 경주에 큰 시장! 동시(동쪽의 시장)가 생긴단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동시전까지 두게 되지.​<★​>
지금의 공정거래위원회 정도로 생각하면 돼.
​남북국시대에 와서는 경제가 매우 부흥해서 대도시 뿐만 아니라 지방 교통 요충지에 시장이 생겨나고,
효소왕 때 경주에 동시 뿐 만이 아니라 남시와 서시가 설치가 돼.
여기에도 역시 동시전처럼 이를 관리하는 시전을 두게 된다는 것을 기억!

3. 수공업

수공업은 처음에는 주로 노비들을 시켜서 무기나 각종 물건들을 제작하게 하는 노비수공업 형태였는데, 이를 국가가 관청을 갖추고 전문가를 동원해서 관영수공업 시대를 열었어.
시간이 지날 수록 재화를 생산하는 수공업이 전문가를 둘 정도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4. 무역

4세기 이후에는 국제무역이 발달해.
고구려는 남북조 및 북방민족, 백제는 남조 및 일본,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을 했지.
하지만 신라는 진흥왕 때 당항성까지 확보하면서 중국과 직교역이 가능해지는 것을 기억!
지도를 통해 당항성 위치 파악해둬.(지금의 인천 근처에 있음)
또한 무역은 삼국시대에는 공무역이 주였는데, 남북국시대에는 사무역까지 활발해진단다.

(1) 삼국시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중국으로부터 비단·약재·서적·유교·불교 등의 정신문화를 수입하고, 말·은 등을 수출했어.
또한 일본 등의 주변 국가에 생활도구 및 철제갑옷, 그리고 불교 등 선진문물을 전파하여 그들의 고대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지.

(2) 발해
여긴 무역파트지만 발해의 경제활동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할게.
발해는 벼농사보다는 밭농사(조 보리 콩 등)를 주로 지었고, 목축과 수렵(모피·녹용·사향)이 발달했어.
부여와 고구려 땅 위에 나라를 세웠으니 그들과 경제 형태가 비슷하겠지?
공물로는 주로 베, 명주, 가죽 등을 거뒀지.
그리고 금속 가공업과 직물업이 발달했다는 것도 기억!

다시 무역으로 돌아와서!
발해는 유명한 5개의 무역로가 있어.
서경 압록부의 압록도(당), 동경 용원부의 일본도, 남경 남해부의 신라도, 그리고 거란도와 영주도<★​>의 명칭을 꼭 알아둬.
특히 당나라에는 산둥반도 덩저우에 발해관이 설치될 정도로 매우 활발했어.
발해는 말​(솔빈부의 특산품으로 유명)<★​★​★​>, 모피, 인삼, 불상, 자기를 수출했고, 비단과 책을 수입했다는 것도 기억!

(3) 통일신라
몇몇 주요도시들이 있는데...
당항성은 산둥반도(북로)​<★​>​와, 영암은 상하이(남로)와의 교류가 활발했어.
울산은 이슬람에서까지 배가 들어올 정도로 부흥했었지.<★​★​>​
증거로는 유리제품과 보검 등이 있어.

완도의 청해진(흥덕왕 때 설치) 하면 뭐가 떠올라? 바다의 왕자 장보고!<★​★​★​★​★​★​★​★​>
당나라, 신라, 일본의 해상무역루트를 이으면서 동아시아 국제무역을 장악했던 인물인데...<★​★​>

그 무역루트에 해적들이 겁나 많아서 그 피해가 막대한 거야.
장보고는 당나라의 서주 무령군 소장이었거든?
하지만 그의 조국 신라인들이 해적 때문에 노비로 팔려오는 것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다시 귀국하여 흥덕왕을 찾아뵙고 청해진을 설치해.
그래서 해적들을 싹 다 잡아버리고, 일본에는 회역사,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 등의 교역 사절을 파견하여 무역을 부흥시켰단다.
이 분 없었으면 통일신라의 무역이 축소되어서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겠지.
이렇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에 신라방(집단거주지), 신라촌(집단거주지), 신라소(관청), 신라관(여관), 신라원(사찰)이 생겨.
신라원 중에 장보고가 산둥반도에 세운 법화원이 있는데, 시험 보기에서 법화원 나오면 '장보고 얘기하는구나.'라고 눈치를 딱! 채야돼.
또한 일본 엔닌이라는 승려가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를 여행한 후에 고마운 마음으로 지은 입당구법순례행기<★​>​​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

일본과는 8세기가 되면서 무역이 활발해져.
신라말을 통역하는 신라역어소까지 일본에 설치될 정도였어.

● 철제농기구 대중화. 지증왕 때 우경 장려. 휴경농업. 소지왕 때 대도시에 시장 생김. 지증왕 때 동시와 동시전. 효소왕 때 서시와 남시. 노비수공업 -> 관영수공업. 남북국 시대에 와서 사무역이 활발해짐.
● 발해 : 밭농사·목축·수렵 위주. 금속가공업과 직물업 발달. 초기에는 거란과 일본과 교역을 틈. 시간이 흘러 문왕 때는 당과 신라와도 교역함. 교역의 길(압록도,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 영주도). 당나라에 발해관. 말, 모피, 인삼, 불상, 자기를 수출. 비단, 책을 수입.
● 통일신라 : 당항성은 산둥반도. 영암은 상하이. 울산은 이슬람(유리, 보검). 장보고(청해진. 법화원. 회역사와 견당매물사 파견. 엔닌-입당구법순례행기). 당나라에는 신라방(집단거주지). 신라촌(집단거주지). 신라소(관청). 신라관(여관). 신라원(사찰)! 일본에는 신라역어소 설치될 정도로 무역 활발.

​IV. 사회

이제 삼국과 남북국시대의 사회를 살펴보자.

1. 전반적인 사회 모습

삼국시대는 귀족, 평민, 천민으로 신분구조가 형성됐어.
평민 중에서는 호민(부유한 자)과 하호(가난한 자)의 생활양식이 매우 달랐지.
귀족은 대부분 왕이나 부족의 족장 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은 사회적 특혜를 누리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단다.
신라에서는 흥덕왕 때 사치 금지령까지 내려졌을 정도로 귀족들이 식읍, 녹읍, 전장(대농장) 등으로 인한 수입으로 부유함이 넘쳐 흘러서 금으로 된 호화별장과 사치품을 몸에 두르고 살았어.
반면에 평민과 천민은 뭐... 인생이 헬 그 자체지...
아직 시비법이 발전하기 전이라 생산력도 그닥이었고, 무거운 세금과 지대 등 귀족들의 수탈에 시달려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했어.


(1) 고구려
지배층은 왕족 계루부 고씨를 비롯한 5부족의 귀족들이야.
고구려는 상무적 기풍이 강했고, 엄격한 형법을 시행하여 사회를 유지했단다.
반역자는 화형시킨 후에 목을 베고 가족들을 노비로 전락ㄷㄷㄷ
전쟁에서 패하거나 항복해도 사형.

그리고 남의 가축을 죽이면 노비로 삼는 등 고구려는 지배층 재산을 철저하게 보호했어.

(2)백제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8성 귀족이야.<★​>
고구려와 뿌리가 같기에 풍습이 매우 비슷했어.
법률을 살펴보면 도둑질한 자는 귀양을 보내는 동시에 2배를 배상해야 했고, 뇌물을 주고 받거나 공금을 횡령한 자는 금고형에다가 3배를 배상하게 했지.
그리고 간음을 하면 남편 집의 노비가 되도록 했어. 특이한 점은 여자만 처벌했다는 점 기억.


(3) 신라
나라 위치상 고립된 상황이 오래됐던 신라는 씨족사회전통이 매우 깊게 남아있어.
씨족사회 전통을 보여주는 첫 번째가 화백회의. 두 번째가화랑도야.
화백회의는 통치체제파트에서 설명했으니 패스하고!
화랑도는 화랑과 낭도의 합침인데...
화랑은 진골귀족, 낭도는 진골귀족~평민의 자제가 모두 함께 소속되어 있는 청소년 집단이야.
보통 화랑은 3~8명 정도로 지도자의 역할을 했고, 그 밑에 다수의 낭도가 있었지.
화랑도는 귀족과 평민들이 같은 소속감을 가지면서 계급간의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었어.
왜냐면 신라는 아래 설명할 골품제라는 정말 폐쇄적인 신분제를 가진 사회라서 계급간의 갈등이 심했거든.
얼마나 폐쇄적이냐면 절대 신분 상승을 할 수가 없다고 봐도 돼.
진골에서 6두품으로 내려간 적(김헌창 가문)은 있어도 6두품에서 진골로 상승한 기록은 없어.
막혀있다는 거지...
환생이 답ㅠ
그리고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조직으로 정비되고, 유교·불교·도교의 정신이 깃든 세속오계(진평왕 때 원광스님이 만듬)를 따랐다는 것도 기억!

(4) 발해
발해는 이원적 구조였다고 다 설명했지?
고구려인이 지배층, 말갈인이 피지배층 피라미드구조였어. (물론 지배층 일부에는 말갈인도 있었음.)
지식인들은 도당 유학을 해서 신라와 빈공과에 수석을 다투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

2. 골품제

신라 및 통일신라의 골품제<★​★​★​★​★​★​>​는 중요하니까 반드시 잘 알아둬.
성골은 왕족, 진골은 잘나가는 귀족, 두품은 어설픈 귀족... 이렇게 알아두면 돼.
골품제는 부족들을 통합하는 과정, 즉 중앙집권체제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신분제야.(씨족사회전통이 아님)
강하고 잘나가는 부족의 족장은 진골이 됐고, 좀 잘나가는 부족은 6두품, 그 다음은 5두품... 이런 식으로 정해버린 거지.
관직까지도 제한을 뒀어. 6두품은 관직 중 아찬까지만 갈 수 있고, 절대로! 이벌찬이나 파진찬 등 그 이상의 벼슬은 할 수 없었단다.
시험에서 5두품은 아찬까지 할 수 있다고 하면 틀린지문이야.
아래 그래프를 반드시 암기해.
또한 신분에 따라 가옥· 수레 등의 크기와 같은 일상생활에도 제한을 뒀다는 것도 알아둬.<★​>

<관등과 골품>

진골은 그래프처럼 이벌찬부터 대아찬까지 독점했고, 성골이 멸종한 뒤에 왕위에 오르기도 했어.
6두품은 득난(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라고 불렸으며 대족장 출신들이야.
똑똑하고 공부를 겁나 잘해서 도당 유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지.
통일 전쟁 이후 학문적 식견과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했단다.
하지만 아찬을 초과해서는 승진이 불가능해서 골품제에 가장 불만이 많은 계층이지.
대표적인 6두품으로는 원효, 강수, 설총, 최치원을 알아두고!
중요한 것은 관등이 복색을 결정하는 거지, 골품이 복색을 결정하는 게 절대 아니다!!! 헷갈리면 안돼!!!
그리고 골품제는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제도가 아니야.
수도나 소경에 있는 지배층의 신분제도야. 지방민이나 평민은 끼지도 못했어.
​참고로 아찬, 대나마, 나마에​ 중위제라는 특진제도가 있었는데, 이게 뭐냐면 예를 들어 대아찬과 아찬 사이에 관직(중위) 하나를 더 만들어서 관등상 상한선에 오른 비진골 귀족에게 특진의 기회를 열어주도록 한 거야.

3. 민족융합정책

신라는 통일을 하자마자 민족융합정책을 펼쳤어.
원래 전쟁에서 이기면 지배당한 국가의 백성들은 노예가 되거나, 승전국에 비하여 큰 차별을 받았는데...
신라는 고구려·백제·신라 따지지 않고 우리 한민족이라면 모두에게 잘해줬다는 거지ㅋ
다시 고구려·백제 부흥운동 한답시고 반란을 일으키면 골치 아프니까 미리 방지한 거야.
또한 단순히 우린 하나라고 외친 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골품제에 편입까지 시켜줬단다.

그리고 9주를 고구려·백제·신라 각 3개씩 할당했고...
모든 우리 민족을 평등하게 등용해서 중앙군 9서당을 조직했다는 것을 알아둬!
이렇게 삼국을 통합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은근히 잘 먹혀 들어갔어.
다 언어와 풍속이 비슷하고 혈연적으로 동질성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고구려 땅 집어삼킨 당나라 봐라.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 아예 딴 놈들이니 민족 융합이 돼?
그러니까 고구려 유민들이 거부하면서 발해를 세웠지.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는 우리 한민족의 나라야. 억지도 유분수;

4. 신분제의 모순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와서는 골품제의 모순이 극심화 됐어.
귀족들은 포석정, 안압지 등에서 술 마시고 띵가띵가 놀면서 잘 먹고 잘사는데, 백성들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굶어 죽어간다고...
백성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결국에는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거듭됐단다.
또한 1~3두품은 구별이 사라져버려서 평민화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둬.
이들은 전혀 귀족 같지도 않고 생활하는 게 완전 평민이랑 다를 게 없는 거야.
걍 평민으로 강등시켜버린거나 마찬가지.


● 고구려 : 5부족 귀족. 상무적 기풍. 무예중시. 엄격한 형법. 반역자 화형 후 참수 및 가족들 노비. 항복하거나 패전자 사형. 남의 가축 죽이면 노비.
● 백제 : 특권층은 왕족 부여씨와 8성 귀족. 도둑질하면 귀양에다 2배 배상. 뇌물죄나 공금횡령죄는 금고형에다가 3배 배상. 간음자는 남편집 노비가 됨(여자만 처벌).
● 신라 : 박·석·김 돌아가면서 왕을 하다가 내물마립간 때 김씨가 세습. 씨족사회전통 많이 남아있음(화백회의,화랑도). 화랑도는 계급간의 갈등 완화. 진흥왕 때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정비. 세속오계(원광스님. 유교 + 불교 + 도교) . 골품제(폐쇄적인 신분제도. 그래프 암기. 신분에 따라 가옥의 크기 등 일상생활에도 제한. 관등이 복색을 결정. 골품이 복색 결정X. 골품제는 지배층의 신분제도(모든 계층 포괄X,평민X).중위제. 6두품(득난. 도당 유학생. 원효와 최치원)​)
● 통일신라 : 성골이 멸종한 후에 무열왕 직계 진골이 왕이 되다가 내물왕 방계 진골이 세습을 시작. 민족융합책(고구려와 백제인들을 골품제에 편입. 9주를 고구려·백제·신라 각 3개씩. 모든 민족을 평등하게 등용한 중앙군 9서당). 통일신라 하대에는 골품제의 모순이 극심화(원종 애노의 난 등 혼란이 거듭됨.1~3두품은 평민화).
● 발해 : 이원적구조(고구려인 지배층,말갈인 피지배층).




- O·X 퀴즈 -
1. 삼국시대에는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뒀다.
2. 통일신라 때 역은 15~60세 남자를 징발했다.
3. 촌주들은 매년 토지, 인구, 가호 등의 변동사항을 조사해서 3년마다 민정문서를 작성했다.
4. 민정문서에 따르면 3년마다 세금을 거두었다.
5. 신라는 소지마립간 때 경주 등 대도시에 시장이 생겼다.
6.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7.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8성 귀족이다.
8. 골품제는 일상생활에도 제한을 가했다.
9. 아찬부터 이벌찬까지는 진골귀족만이 될 수 있었다.
10. 통일신라는 민족융합정책으로 9주를 고구려,백제,신라 각 3개씩 할당했다.







정답 : XXOXO OOOXO
해설 :
1. 삼국시대에는 3등급으로 나눴다.
2. 16~60세를 징발했다.
4. 세금은 매년 걷었다.
9. 대아찬부터 이벌찬까지다.










골품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네.
골품제는 신라 및 통일신라지.

1번 : 제가회의는 고구려.
2번 : 상수리제도는 통일신라. 정답!
3번 : 벽돌무덤은 백제.
4번 : 부여씨 8성 귀족은 백제.
5번 : 경당은 고구려.

정답 : 2번.









지역에 대한 역사를 묻는 문제야.

1번. 거문도에 대한 설명.
2번. 청해진은 지금의 완도지? 정답!
3번. 거제도에 대한 설명.
4번. 영도에 대한 설명.
5번. 진도에 대한 설명.


정답 2번.








왕 대무예 보이니?

1번. 22담로 백제.
2번. 태학과 경당 고구려.
3번. 골품제 신라.
4번. 화백회의 신라.
5번. 거란도 영주도는 발해 정답!

정답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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