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운동과 의열항쟁

I. 발생배경

항일 의병 운동의 사상적 뿌리는 위정척사사상이야.
외세를 물리치고 우리 것을 지키자!!!!
성리학 매니아들이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반대하면서 시작된 것이라, 공화정이 아닌 왕의 권한을 다시 바로 잡겠다는 복벽주의 성향이 강해.
원래는 19세기에 천주교를 상대로 투쟁하다가 2번의 양요와 강화도조약을 겪으면서 서양열강과 일본으로 대상이 바뀐단다.

1860년대 : 이항로,기정진. 서양과의 대원군 통상수교거부 때 이를 지지하며 척화주전론.
1870년대 : 최익현,유인석.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강화도조약 체결 시 개항반대. 5불가소<★​★​>​
1880년대 : 이만손,홍재학(척화상소. 1881). 강화도조약 체결된 후 개화 정책 추진될 때 반대, 영남만인소.


상소도 올리고 집회도 열며 평화적으로 나가다가 그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1890년대부터는 의병을 일으켜 무기를 들고 무력투쟁을 전개해.
이들은 충군사상과 항일구국투쟁(을사의병 이후)의 성격을 나타낸단다.
의병활동은 크게 총 3가지 시기로 구분돼.
을미년, 을사년, 정미년!

● 위정척사사상. 복벽주의. 1860년대(이항로,기정진. 척화주전론). 1870년대(최익현,유인석. 왜양일체론. 개항불가론. 5불가소). 1880년대(이만손,홍재학(척화상소. 1881). 개화정책반대. 영남만인소). 1890년대(의병활동. 을미년·을사년·정미년)

II. 을미의병(1895)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친일 개화파가 집권을 했으며 을미변복령과 단발령이 발표되자 유생들의 눈이 돌아가.<★​★​>​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겠다며 유생들은 동학농민운동 후 남은 세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대규모 항일 투쟁을 시작한단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유인석(제천), 이소응(춘천)<★​>​이 있어.

근데 을미의병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음.
이들의 중심인 유생들이 누구야? 양반들이잖아.
민중들과 합심이 됐겠어?
심지어 유인석은 승전을 거두고 있는 선봉장 김백선이 양반에게 건방지다는 이유로 처형을 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단다;

내부에서 신분차별이 있었기에 단결에 한계가 있었고, 이는 전력 약화를 초래했지.
그래도 목적은 같았기에 활동을 어찌어찌 전개해 나가긴 해.
이들은 주로 친일파와 일본인을 처단하고 지방 관청을 공격한단다.
그러다가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힘을 잃고 단발령이 철회됐으며, 슬슬 관군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고종의 해산권고가 내려지자 대부분 자진해서 해산해.<★​>​

을미의병은 유생들과 동학군이 주 세력인데 말이야...
유생들은 충군사상이 몸에 배었으니 왕명을 잘 따랐지만 동학군들은 어떻게 했을까?
"해산은 무슨!!! 끝까지 싸워서 일본 놈들 몰아내자!!!"
이걸로 끝내지 않고 만주로 가서 계속 의병활동을 하거나 활빈당에 들어가 일본에 대한 항쟁을 계속 했어.

cf)

활빈당 : 활빈당은 원래 화적(도적떼)의 후예였어. 근데 사회모순이 심해지자 이름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살려내는 조직'이 되었지. 그들은 을미의병 잔여세력 + 동학군을 흡수하여 반외세 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고 열강에 맞섰어. 또한 홍길동의 후예라 하면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등 전국적 규모의 비밀조직으로 활동하고 나중에 을사의병에 합세한단다.

● 1895. 을미사변. 을미변복령. 단발령. 유인석(제천). 이소응(춘천). 유생 + 동학농민운동 남은 세력. 의병 내부의 신분차별. 친일파·일본인 처단. 단발령철회·고종의 해산권고가 내려지자 대부분 해산.
● 유생들은 해산. 동학군은 계속 활동(의병활동 및 활빈당)

III. 을사의병(1905)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조병세가 자결<★​★​>하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사설로 실리자 온 백성이 분노했어.
결국 조약의 파기와 친일파들을 숙청하자며 전국적으로 을사의병이 일어나.<★​>​
민종식​ 부대는 홍주성을 점령<★​★​>
할 정도로 일본과 치열하게 싸웠는데 결국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함.
전라북도에서는 그 유명한 최익현이 을사5적을 죽이자며 유생들 대표로 의병을 일으켜서 항쟁했어.<★​★​★​>
근데 최익현은 진위대랑 맞서게 됐는데, 우리 조선 군대인 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순순히 잡혀가...ㅡ.ㅡ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 갇힌 상태에서 왜적이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면서 스스로 굶어죽는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을사의병에서는 평민대장이 나타나. 신돌석!
평민이 기를 펴지 못했던 을미의병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지?
을사의병은 더 이상 유생들만이 주도한 항쟁이 아니라, 구국정신 하나로 뭉쳐졌기에 많은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끈단다.
이들은 을미의병보다 훨씬 더 강한 전력으로 일본과 맞붙었지만, 일본 군대에 비하여 무기와 훈련도가 부족하여 일본과의 화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로 돌아가ㅠ

● 1905. 민영환·조병세 자결. 황성신문(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민종식(홍주성 점령). 최익현(진위대,대마도,굶어죽음). 신돌석(평민대장). 화력차이 극복 하지 못하고 패배.

IV. 정미의병(1907)

1907년에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됐잖아? 이 군인들 다 어디로 갔을까?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강제해산에 항거하여 목숨을 끊자, 이를 들은 군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일제에 맞서 의병이 돼.<★​>​
즉, 의병들은 이제 더 이상 찌질한 민중 봉기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군대가 된 거지.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인들이 함께 하니 화력이 열라 강해졌다고 ㅋㅋ

이에 따라 정미의병은 의병전쟁화....즉 강력한 대일 항전으로 발전해.
참고로 이때는 양반 유생들이 구성원의 24%밖에 안됐어. 한마디로 평민들이 주를 이뤘지.
정미의병은 여기저기서 일어난 전국 의병들을 연합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만명 규모의 13도 창의군이 결성(1907)되어 1908년에 서울 진공 작전까지 펼치려고 했어.<★​★​★​★​★​★​★>​
하지만 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유생들이 평민대장들을 배척하는 바람에 신돌석·홍범도 등의 부대가 제외되고<★​>​,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부대에서 이탈해 ㅡ.ㅡ
이렇게 군대가 엉망이 되자 결국 정보가 새어나가; 그리고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실패...
정미의병은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서양 열강들에게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여 의병차원을 벗어나 '대한제국 VS 일본' 형태로 전쟁을 하려고 했는데... 결말이 안타깝지;

정미의병 이후 1909년에는 의병운동이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의병들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항일유격전을 하면서 호남의병으로 이어져.
일본은 의병들이 열라 세지니까 위기의식을 느끼고 남한대토벌작전(1909)을 펼쳐서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등 겁나 학살을 했단다ㅠ<★​★​>
이로 인하여 전라도일대가 약탈·방화·살육으로 쑥대밭이 됐어;
이 지랄 같은 남한대토벌작전 때문에 2개월 동안 수 천 명이 넘는 의병들이 원숭이놈들에게 체포 및 학살당했지...
결국 우리 의병들은 일제를 피해 간도와 연해주로 나가서 활동을 해. 이들이 나중에 항일무장투쟁세력으로 연결된단다.

● 1907. 군대해산. 박승환 자결. 의병이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군대가 됨. 평민들이 주를 이룸. 신분차별 여전함(신돌석,홍범도 부대 제외). 서울진공작전(1908. 이인영,13도 창의군,부친상으로 이인영 탈퇴,일본선제공격으로 실패). 국제법상 교전단체
● 전라도 중심으로 의병활동 계속. 남한대토벌작전(1909). 간도와 연해주. 항일무장투쟁세력으로 연결.

V. 의열항쟁

남한대토벌작전에 그냥 당하고만 있을세라... 이때 일본 놈들과 매국노에 대한 처단도 활발히 일어나.
의병항쟁이 집단적 항쟁이라면 의열항쟁은 개별적 저항이지.
이들은 나철·오기호 등이 을사 5적을 처단하겠다면서 암살단 자신회를 조직(1909)<★​>,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1차 한일협약 때 외교고문, 일본 앞잡이 양키) 저격(1908)<★​>​, 이재명의 이완용 피습사건(1909.12. 실패)​<★​★​★​>,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1909.10.26)<★​★​★​★​> 등으로 일본 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어.
이 분들의 희생은 비록 나중에 설명할 식민통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일본에게 저항의식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훗날 독립운동가들의 큰 귀감이 됐단다.

● 을사5적암살단(나철·오기호 등. 1909). 스티븐스 저격(장인환·전명운. 1908). 이완용 피습사건(이재명. 1909.12). 이토히로부미 처단(안중근. 1909.10.26)




- O·X 퀴즈 -
1. 1880년대 최익현, 유인석 등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5불가소를 올렸다.
2. 단발령은 을미의병이 일어나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3. 을미의병은 내부의 신분차별이 활동에 지장이 됐다.
4. 을사의병 민종식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5. 을사의병에는 평민대장이 있었다.
6.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인하여 군인들은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정미의병이 되었다.
7. 정미의병은 이만손을 총대장으로 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했다.
8. 정미의병은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달라고 서양 열강들에게 요구했다.
9.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학살을 자행했다.
10. 장인환은 이완용을 피습하였지만 실패했다.






정답 : XOOOO OXOOX

해설 :
1. 1870년대 설명.
7. 이인영이 총대장이었다.
10. 이재명에 대한 설명.









안중근에 대한 그림 및 설명이야.

1번. 나석주에 대한 설명.
2번. 이토 히로부미 사살. 정답.
3번. 한인 애국단 결성은 김구.
4번. 김원봉에 대한 설명.
5번. 이완용 습격은 이재명.

정답 2번.









영국이 무단 점령한 곳과 임병찬 순국한 곳은 거문도지.

정답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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