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정책의 전개
I. 개화파
1. 실학자들의 등장
18세기 말에 실학자들이 등장을 해.
성리학 같은 철학을 때려치우고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자! 라고 해서 기술과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거지.
유명한 학자로는 정약용·박지원·홍대용·박제가 등이 있어.
그들은 토지개혁·농업기술·무기·상공업기술 등을 발전시켜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여 근대국가의 발판을 마련해.
하지만 이때 당시는 워낙 조선 양반들이 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 실학은 그리 크게 발전하지 못한단다.
성리학자들 입장에서 봤을 때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그들의 존명사대주의를 비판하고, 봉건 신분제도를 극복하려고 하는 실학자들은 적이나 마찬가지므로 그들을 크지 못하게 억눌렀거든.
다 설명했던 내용이야.
2. 개화사상의 형성
청나라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자, 이 시기에 청나라를 방문했던 조선인들이 이를 보고 깜짝 놀라!
특히 실학사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학자들...
대표적으로 박규수·오경석·유홍기가 있어.
이렇게 충격을 받은 조선인들은 이대로 있다가는 조선이 세계의 흐름에 뒤쳐진다 생각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돼.
그래서 조선에 청나라 책과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와 연구하고, 개화사상을 형성하지.
3. 개화 정책의 시행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관료들이 이제 개화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해.
처음에는 유학자들의 반발로 진행이 어려웠으나, 결국에는!
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하나씩 실행해 나가지.
cf) 통리기무아문은 2차 수신사가 갔다 온 후 설치되어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하여 폐지될때까지 1880~1882년에 존재했음.
통리기무아문은 개화를 추진하는 중심기구야.
밑에 12사<★>를 두고 별기군창설<★★>,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파견하는 등의 일을 했단다.
훗날 갑오개혁 때의 군국기무처와 반드시 구별해서 암기해야 함.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보자.
첫째. 신식군대를 새로 조직!
구식군대인 5군영을 2영(무위영+장어영)으로 줄여버리고,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해.(1881)<★>
일본인 교관을 영입하여 신식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이건 임오군란 편에서 다시 나올 겨.
둘째. 외국에 사신을 파견!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게 사신을 요청한단다.
이를 수락한 조선 조정은 1876년에 김기수를 중심으로 1차 수신사를 파견해.<★★★★★★>
통신사는 우리가 일본에게 가르쳐준 개념이면, 수신사는 우리가 배우러 가는 거야.
통신사가 먼저! 수신사가 나중에! 통수 통수 뒤통수! 기억하지?
2달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근대 문물들을 견학한단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게 적대적이었던 조선 여론은 반감이 수그러들고, 그들에게 배우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도조약의 불평등함으로 인하여 조선과 일본은 마찰을 빚게 돼.
이를 해결하고자 조선 조정은 2차 수신사로 1880년에 김홍집을 파견한단다.<★>
강화도조약과 그 부록들을 시정하는 것이 목적이야. 특히 무관세 조항이랑 개항장을 논의하러....
하지만 일본 놈들이 이를 회피하여 별로 성과를 못 냈어.
근데 이때 김홍집은 마침 일본에 있던 청나라 공사관의 참찬관 황쭌셴을 만나 조선이 어떻게 하면 부강해질 수 있는지 논의를 해.
그리고 귀국할 때 논의 내용이 담긴 황쭌셴(황준현)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지고 와서 조선에 유포한단다.<★★★★>
조선책략의 내용을 보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주를 이루는데, 이를 위해서 조선은 청나라·일본·미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어.<★★>
고종 역시 이에 동의하였고 결국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준비하게 되지.
이렇게 수신사가 다녀와서 조선책략이 퍼지자 1881년<★★>에 유학자들이 난리를 일으켜!
바로 영남만인소 사건<★★★★★★>이야. 이게 뭐냐면 서양열강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내용으로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 1만명이 서명을 하여 상소를 올린게지.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책략 내용을 맹렬히 비판하는 거야.
하지만 고종은 이런 상소를 가볍게 무시해주시고~
발전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박정양을 중심으로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보내.(1881.4)
조사시찰단은 수신사처럼 공개적으로 간 게 아니라 암행어사처럼 일본과 조선 몰래 파견했다는 것(영남만인소사건 때문에 눈치 보여서)을 기억해둬.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관 도입 및 임오군란 후 배상문제 해결을 위해 1882년 박영효를 중심으로 꾸린 3차 수신사가 일본을 다녀오지.
또한 고종은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할테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단다. 청나라는 이를 수락을 하고 1881년 9월에 38명의 유학생을 받아줘. 이를 영선사<★★★★★>라고 해.
영선사는 김윤식<★★>의 인솔 하에 군사기술을 배우는 것, 그리고 조미수호조규를 맺기 전에 강화도조약처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내용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어.
하지만 영선사는 재정이 부족해서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기 귀국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단다ㅡㅜ
영선사는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들을 파견한 것 자체가 선진 문물도입과 국제문제 해결을 위한 중대한 외교활동이었고!
이들은 신식문물을 꽤나 배워 와서 조선에 근대화 바람을 일으켜!
이에 조선에 전환국(1883~1904. 화폐 주조 기관. 당오전 발행), 박문국(1883. 인쇄소-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 기기창(1883. 무기제조) 등의 근대화 시설들이 세워진단다.<★>
그리고 결국 1882년 4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이것이 서양열강 중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라는 것을 기억해.<★>
잠깐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주요내용을 살펴보자면... 영사재판권(치외법권) 인정, 최혜국 대우 인정<★★★★>, 관세조항을 삽입, 그리고 거중조항(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경우 주선을 다하여 도와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단다.
조약을 체결한 후에 조선은 미국에 보빙사(민영익,홍영식,서광범,유길준)<★>를 파견(1883)하여 발전된 문물을 배우고 조선으로 들어와 신식우편제도(우정국. 1884), 경작기계 등 개화정책에 큰 일환을 하게 돼.
또한 미국에 개항한 김에 영국(1882~1883)·독일(1883)·러시아(1884. 나머지는 청의 알선으로 조약을 맺었지만, 러시아와는 독자적으로 함)·프랑스(1886. 천주교포교권 인정 때문에 늦어짐)<★★> 등과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닫힌 문을 세계로 활짝 열지!
그러나! 우리 조선은 힘이 약해서 강화도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을 맺었다는 것을 기억 하렴 ㅠ
● 실학자들의 등장(박규수,오경석,유홍기). 개화정책 실시. 통리기무아문(1880~1882. 12사. 별기군(1881). 조사시찰단(1881. 신사유람단. 몰래 파견). 영선사(1881. 조지 귀국. 근대화 바람)). 박문국(1883),전환국(1883),기기창(1883). 수신사파견(1차(1876. 김기수) 2차(1880. 김홍집. 강화도조약 및 부록 개정 노력. 황쭌셴의 조선책략(러시아 견제 내용. 청일미와 친하게 지내). 영남만인소사건(이만손. 1881))3차(1882. 박영효)).
●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 최혜국. 관세. 영사재판권. 거중조항). 이를 계기로 다른 서양열강에게도 개항(영국-1882~1883. 독일-1883.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보빙사(1883. 민영익,홍영식,서광범,유길준). 우정국(1884).
II. 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는 개화파랑 반대되는 인물들이라 생각하면 돼. 한마디로 유학자들이지.
전통적인 성리학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척화주전론, 왜양일치설, 개항불가론을 들고 나섰어.
그리고 결국 이만손을 중심으로 영남만인소사건을 일으키며 엄청난 반항을 하지.
(이는 '항일의병운동과 의열항쟁' 시간에 정리해줄테니 여기서는 걍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자)
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법...!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근대화 바람을 유학자들만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으리오.
결국 이들은 성리학질서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훗날 항일의병운동세력으로 이어진단다.
● 위정척사파 : 개화정책반대. 항일의병운동세력으로 연결.
- O·X 퀴즈 -
1.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어 개화정책을 실행했다.
2. 통리기무아문은 밑에 12사를 두고, 5군영을 창설하였다.
3. 조선 조정은 1876년에 김홍집을 중심으로 1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4. 1차 수신사가 파견된 후 조선책략이 조선에 들어왔다.
5. 조선은 김윤식을 중심으로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보냈다.
6. 영선사는 재정이 부족하여 조기 귀국하였다.
7.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양열강과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다.
8.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되었다.
9. 조선은 서양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10. 유학자들은 척화주전론, 왜양일치설 등을 내세우며 개항에 반대하였다.
정답 : OXXXX OOXOO
해설 :
2. 5군영을 2영으로 줄이고, 별기군을 창설했다.
3. 김홍집이 아니라 김기수.
4. 1차가 아니라 2차 수신사.
5. 김윤식이 아니라 박정양.
8. 조약이 체결 된 후에 파견되었다.
기출문제!
1880년에 설치된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래.
통리기무아문이지.
1번 : 2차 갑오개혁 내용.
2번 : 통리기무아문과 관계 없음.
3번 : 2영으로 축소하며 별기군 창설 ㅇㅋ. 정답!
4번 : 흥선대원군의 대내 정책.
5번 : 2차 갑오개혁 내용.
정답 : 3번.
황준헌이라고 대놓고 알려주네.
조선책략 이후를 골라보자.
ㄱ. 운요호 사건은 그 전.
ㄴ. 척화비 건립도 그 전.
ㄷ. 조선책략은 영남만인소 사건을 불러왔지.
ㄹ. 조미수호통상조약 ㅇㅋ.
정답 5번.
황준헌이 언급되는 상소라 해서 곧바로 영남만인소로 성급히 판단하면 안돼.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곽기락 상소야.
1881년에 올린 것이지.
이런것 까지 알 필요 없어.
단서 뽑아내면 돼.
조선책략 퍼진 이후 고르면 되겠지?
1번. 기기창은 1883년. 정답.
2번. 1차 수신사 파견은 1876년.
3번. 해국도지유입은 1858년.
4번. 신미양요는 1871년
5번.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정답 1번.